반환 후 중국과 홍콩 사이의 경제적 관계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1980년대 홍콩 경제의 규모는 항상 중국 경제의 10% 이상을 차지했고 1993년에는 20%를 초과했으나, 중국의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2014년에는 3% 이하를 기록했다. 이는 중앙정부에 대한 홍콩의 교섭력에 영향을 미쳤다. 

홍콩 반환 직후 아시아 외환 위기가 닥쳤고 미국 달러와 연동된 홍콩 달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금리가 폭등했고 주가와 부동산 가격의 대폭락이 이어져 마이너스 성장에 빠졌다. 이어 2003년 3월부터 6월에 걸쳐 사스로 인해 여행, 소매, 음식, 오락 등의 업계에서 큰 타격을 입었고 실업률 또한 최악을 기록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2003년 중국 중앙 정부가 홍콩과 ‘’경제무역관계 긴밀화 협정”을 맺어 구제책을 펼쳤다. 경제 부문에서 중국﹒홍콩 융합이 전개된 것이다. 중앙정부는 중국 내 일부 도시의 주민들에게 홍콩으로의 개인 여행을 허가하고, 인접한 선전시 주민들에게 홍콩에 대한 복수 비자 발급을 시행했다. 특히 이는 중국 대륙으로부터의 관광 분야의 확대를 가속화했다. 홍콩에서 대륙을 방문하는 방문객 수는 2007년 이래 연인원 7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방문객의 증가는 홍콩의 소매업에 큰 이익을 가져왔다. 홍콩에서의 중국 투자도 증가하고 있는데, 홍콩 증권거래소 현황을 보면, 2006년 이래 40%를 넘어서고 있다. 

2003년 경제침체 상황에서 홍콩 정부가 추진한 ‘국가안전조례’는 홍콩 시민들의 큰 분노를 샀다. 50만 명의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해 조례는 폐기되었다. 중국정부는 이를 경제에 원인이 있다고 판단해 경제융합을 가속화했다. 홍콩 제품의 무관세 대륙 수출, 홍콩으로의 개인여행 확대 등 연이어 홍콩 경제 지원책을 펼쳤다. 이와 함께 실업률이 내려가고 경제성장률을 회복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쓰촨 대지진 시기에서 홍콩에서는 중국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으며, 관계도 좋았다.

그러나 경제융합으로 인한 부작용은 날로 확대되었다. 

우선, 홍콩 인프라에 대한 인구 압력이 증가했다. 대륙으로부터의 홍콩 관광객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교통기관과 상점이 혼잡해지고 의료, 교육 등의 사회복지 인프라가 부족해졌다. 중국대륙의 한 자녀 정책 규제를 피해 대륙의 임산부가 홍콩에서 출산하는 일이 늘어나 산부인과 병상이 부족한 상황이 발생했다.

또한, 시민 생활의 질이 저하되었다. 특히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 과밀도시 홍콩은 부동산 투기가 활발한데, 개인여행이 해금되자 대륙의 부유충이 부동산 구입에 나섰고, 홍콩은 ‘자본 투자자 입경 계획'(투자 이민)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일정 액수 이상 투자하는 이에게 홍콩 거류권이 부여되었다. 결과적으로 10년간 5배 이상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고, 집세 또한 폭등해 외식과 소매상의 가격에도 영향을 미치며 서민의 생활을 압박했다.

이에 더해, 대륙과 홍콩 시민 간 감정적 대립이 발생했다. 대륙 관광객 중에는 대륙에서 독점 판매를 할 목적으로 일용품을 대량으로 한꺼번에 사들이는 운반책이 많았다. 홍콩 시민의 일부는 이러한 보따리상을 ‘메뚜기’라고 부르며 멸시했다. 관광객들의 공공예절을 두고 홍콩과 중국에서 감정적 대립이 이어졌다. 홍콩에서는 ‘메뚜기 반대 시위’가 일기도 했다. 

이는 홍콩시민들에게 “홍콩은 도대체 누구의 거리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했다. 건물세 폭등으로 인해 철수한 상점 자리에 대륙 관광객 전용 귀금속 점포와 화장품 가게가 들어섰다. 관광객의 대량 유입이 홍콩 거리를 ‘중국화’했다. 길거리에 넘쳐나는 관광객들에게 봉사하는 상점이 현지 시민들을 고객으로 하는 상점을 쫓아내는 현상은 홍콩 시민들에게 커뮤니티의 다양성과 자주성, 자유와 민주의 상실감을 갖게 만들었다.

제조업이 중국 인접 지역으로 이전됨에 따라, 2010년대 중반에는 홍콩 동북부의 공업지구는 상업지구 개발이 추진되었고, 그러한 ‘도시재생’으로 빈 공간에 들어서 있던 문화예술 공간들과 작은 상점들은 내몰려 갔다. 홍콩의 동북부 재개발 반대 시위를 벌이다 수감된 활동가들의 일부는 일부는 우산운동으로 체포된 인사들보다 높은 형량을 받았다. ‘경제적 이익의 침해’가 정치적 소요보다 과중하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모순은 우산운동 및 2019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으로 작용했다.